지난 16일 기업과인권 네트워크는 “체크리스트를 넘어 – 인권존중 실현을 위한 인권실사 입법화를 위한 제언” 한국어 보고서 발행 기념 웨비나를 개최했다.
기업과인권 네트워크를 대표해 발제를 맡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김두나 변호사는 서두에 인권실사 제도화는 세계적으로 높은 관심 속에서 자율규제에서 타율규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내법에는 환경과 인권을 모두 포괄하는 일반적인 규정이 부재하고, 해외사업 비중이 높은 역외적인 인권침해 사안 대응과 피해자 구제안이 불충분하다며 정부가 실질적으로 기업의 인권·환경침해를 예방할 수 있는 인권실사 법제화를 강조했다.
이어 김두나 변호사는 기업과인권 네트워크에서 제안한 공급망 인권·환경 실사법 초안의 주요 내용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기업의 인권환경 존중’ 책임을 법에 명시할 것을 제안했다. 인권환경 실사가 기업의 투자나 평판 리스크 관리 차원이 아니라 기업의 인권환경 존중을 분명한 목적으로 하는 점에서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환경실사의 기준은 특정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기준을 법에서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국내법과 한국이 가입하고 비준한 국제협약에 기인해서 법의 명확성을 확보하고, 기후위기 등과 같은 중대한 이슈에 확장성을 열어 두어서 기업이 폭넓게 인권·환경 존중을 다 할 것을 제안했다.
대상기업은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중소기업은 규모를 고려해서 의무를 완화하거나 적용 대상에서 일부 제외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인권·환경 존중 의무와 고위험 사안 및 지역에 대한 인권·환경위험에 대해서는 공급망 실사 의무 등이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국적기업의 경우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에서 발생한 직·간접적인 인권침해를 통해 이익을 얻는 방식으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업활동과 자신과 공급망 내에서 관계 맺는 다른 기업의 사업도 인권·환경실사 의무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사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거나 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해관계자의 참여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관련된 정보 공개 또한 폭넓고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실사의 전과정과 위험 식별 결과, 실행 결과, 평가 결과 등을 포함한 ‘인권·환경실사보고서’를 작성해서 공개할 것 제안했다. 위험이 현저히 높은 사안 혹은 이해관계자가 실사 이행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할 경우에는 보고서 공개를 넘어 이를 엄밀하게 감시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관리·감독 기구로서 ‘인권·환경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해관계자는 기업의 실사에 관해서 이의제기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위원회는 이를 조사 및 심의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기업의 실사에 대해서 적절한 권고를 할 수 있는 시정 절차를 둔다면 효과적으로 이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이 실사를 불이행했을 때에는 행정적·형사적 제재가 필요하며, 실사 불이행으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있음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음으로 다국적 기업의 환경·사회 문제를 연구하는 네덜란드 비영리 단체 SOMO의 선임연구원이자 “체크리스트를 넘어” 보고서의 주저자인 조셉 연구원이 발제를 이어갔다. 그는 보고서 발간 후 네덜란드 의회에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지난해 11월에는 6개의 정당이 함께 구속력 있는 인권실사 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해당 법안이 OECD 가이드라인과 “체크리스트를 넘어”보고서의 상당 부분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발제를 이어갔다.
네덜란드 인권실사 법안의 첫 번째 주요 사항은 기업 활동으로 영향을 받은 피해자에게 행정·민사·형사적인 차원에서 구제책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행정적인 차원으로는 기업이 인권실사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피해자에게 구제책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였을 경우 규제당국이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민사적인 차원으로는 네덜란드 기업의 공급망과 연관된 전 세계 모든 피해자가 네덜란드 민사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형사적인 차원으로는 어떤 기업이 여러 차례 인권실사 이행 의무에 실패하면 경제적인 위반(violation) 혹은 범죄(criminal)라는 규정을 두어 기업의 경영진과 이사회의 임원을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두 번째 요소는 인권실사를 이행해야 할 전체적인 가치사슬의 범위이다. 법안은 기업이 공급망 내 이루어지는 모든 비지니스 관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명시한다.
예를 들어 군수물자나 감시기기 등을 제조하는 기업이 미얀마와 같은 억압적인 군사정권에 해당 제품을 판매한다면, 네덜란드 법안은 기업 역시 인권침해에 가담한 책임이 있다고 밝힌다. 즉 기업은 자사 물품 생산의 원료에 관한 가치사슬의 상류(upstreatm) 외에도 구매자, 의뢰인 등 가치사슬의 하류(downstream)까지 인권환경실사를 이행해야 한다. 세 번째 요소는 기후변화이다. 네덜란드 법안에서는 기후변화의 부정적인 부분도 기업이 실사활동을 통해 예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이 전체적인 공급망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기후변화 완화 계획 또한 세워야 한다고 명시한다.
네 번째 요소는 은행, 연금기금, 보험사, 투자기관 같은 금융 부문도 인권실사 의무에 포함 돼 주요한 행위자로 역할 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섯 째 요소는 ‘책임감 있는 단절(responsible disengagement)’에 대한 것이다. 이 역시 기업이 공급망에서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기업이 인권침해에 연루된 국가에 소재한 공장으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다면, 우선 해당 공장에 문제를 개선하도록 권고하고 이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사업관계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새로운 경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책임 있는 단절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섯 째로 법안은 공급망 내 기업의 책임이 정적(static)이 아니라 동적(dynamic)이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즉 기업이 공급망 내에서 인권·환경문제에 직접 연관이 있는 수준에서 아무런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업관계를 유지한다면 인권환경문제에 기여하는 것으로 책임의 정도가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법안은 다중이해관계자 이니셔티브 (multi-stakeholder initiative)의 역할에 대해 분명한 한계를 명시하고 있다. 인증과 감사 제도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주로 이들은 기업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비판은 최소화하며 기업이 서비스 사용을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기업이 해당 기관을 통해 발급 받은 인증서는 일종의 면책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에 네덜란드 법안에서는 인권실사의 최종적인 책임은 기업에게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접근은 OECD 가이드라인이나 UNGPs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위의 발제 내용을 바탕으로 법무법인(유) 지평의 민창욱 변호사와 법무법인 지향의 신유정 변호사가 토론을 이어갔다. 먼저 민창욱 변호사는 “체크리스트를 넘어” 보고서가 실무 지침서로는 훌륭하나 법제화 측면에서는 일부 고려할 지점이 있다고 밝혔다.
먼저 인권실사와 기존의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CP)이 본질적으로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업이 기여 또는 직접 연관된 인권침해를 구분하고 그에 따라 법적책임을 차등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정보의 차등적 공개 의무에 대해서도 정교하게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실사의 적절성 측면에서 대상기업의 범위를 현실적·실무적 문제를 반영하고 해외 입법례와 기업 규모별 차등, 경과 규정 등을 고려해 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법무법인 지향의 신유정 변호사는 국내 공공기관과 일부 대기업이 인권실사와 유사한 관행을 제한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실상은 표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실사가 기업의 인권침해 예방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서는 “체크리스트를 넘어”보고서나 기업과인권 네트워크에서 제안한 법안의 주요 내용들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급망에서 기업의 책임을 구분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야기·기여·연관의 개념을 인권실사 법제에 통합하고, 각 유형에 따라서 기업이 지는 책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기업이 공급망에서 해야 하는 역할을 알려주는 예측 가능한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인권실사 법안의 사례처럼 국내 인권실사 법제화 과정에서도 이사의 책임에 대해 충분히 논의되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