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인권 네트워크, 대한변협, 국회ESG 포럼이 12일 공동으로 EU 집행위원회 디디에 레인더스(Didier Reynder) 법무청장 초청 강연을 개최했다. 강연은 기업의 지속가능성 실사에 관한 법률의 필요성과 유럽에서의 추진 과정 및 한국의 과제를 주제로 진행됐다.

디디에 레인더스는 EU 집행위원회 법무 분야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안(Directive on 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침안은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전체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 환경,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실사 의무를 부여하고 불이행 시 행정상의 제재와 피해자에 의한 민사상의 손해배상 책임 이행을 강제하는 것이 골자이다. 지침안은 2022년 2월에 발의되었고, 유럽의회와 EU 이사회의 승인을 앞두고 있다.

디디에 레인더스 법무청장은 “EU는 자유·개방 무역과 규칙기반의 국제질서 및 효과적인 다자주의를 추구하고, 역내외 고유의 가치에 충실하고자 하므로 인권·환경적인 리스크 요인을 발굴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침안의 취지는 “문제가 되는 나라에서 유럽 기업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럽사회 민간 부문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을 활용해서 해당국가에서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려는 것”이 주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이어 그는 일부 회원국의 법제화와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만으로는 역부족이라며 임계질량을 달성해야 지속가능한 사회, 경제로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자발적인 시스템에서 의무적인 모델로의 전환이 법제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EU 차원에서 실사가 법제화되면 시장에서 보다 공평한 경쟁의 장이 열리고, 법적인 확실성이 생기면서 컴플라이언스에 따른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사 적용 대상과 관련해서는 “모든 사업 부문에 걸쳐 대기업에 적용되고 실질적으로 산업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여러 섹터 중에서도 “인권·환경 피해 유발 가능성이 높은 농업, 섬유, 신발, 광업, 채굴 등의 섹터에 대해서 실사 이행을 강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소기업은 지침안에 포함되지 않으나 대기업의 가치사슬에 포함되기 때문에 중소기업도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EU 차원에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침안이 올해 유럽의회와 EU 이사회로부터 승인을 얻는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으로부터 약 5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업들이 영향을 받으리라 예측했다. 그는 법제화된 실사는 “기업들의 경영방식과 공급망 관리에 있어서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며 “기업의 회복력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경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임성택 변호사(대한변협 ESG 경영특별위원회 위원장)와 김두나 변호사(기업과인권 네트워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법)가 패널토론을 진행했다.

임성택 변호사는 UNGP에서 고안한 실사의 개념이 유럽을 중심으로 의무화·법제화되고 있으며, 실사가 ESG 평가·공시·투자의 기준이 되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인권·환경 실사 요구가 증대하고 있는 일련의 흐름을 설명하며 실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실사법의 주요 쟁점이 △법적의무화 여부 △적용대상과 공급망 범위 △실사의 범위와 내용 △이해관계자 참여와 제재 및 면책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에는 이미 ‘인권경영 가이드라인’과 ‘기업과 인권 길라잡이’ 등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었지만, 기업의 인권 실사 진행이 미미한 점을 지적하며 법제화를 통한 실사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실사 정책 수립 및 이행 시 이해관계자의 참여권 보장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허위 공시나 정부의 이행 명령 불이행 시 예외적으로 이루어지는 제재와 면책이 국제사회의 흐름이기 때문에 한국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규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김두나 변호사는 효과적으로 인권·환경실사법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기업의 인권·환경 존중’ 책임 명시 △명확성과 확장성을 포함한 인권·환경실사 기준 설정 △중소기업 특례 규정 △공급망 전반에 대한 인권·환경실사 의무 명시 △고위험 상황에 관한 인권·환경실사 의무 강화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협력의무 규정 △인권·환경실사 과정과 결과 공개 의무 규정 △인권·환경실사 이행 지원 및 분쟁 해결 기구 설치 △인권·환경실사 이행 확보수단 규정 △인권·환경실사 불이행과 사법적 구제에 대한 내용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포함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두나 변호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실사법이 기업의 인권·환경 침해를 중단하겠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선언이자 승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실사법이 기업의 평판이나 리스크 관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기업의 인권·환경 침해를 방지하며 피해자들에게 구제를 제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적 수단이 되길 바란다”라면서 발언을 마쳤다.